16년만에 돌아온 파맛 첵스. 사진 농심켈로그

[AP신문=하민지 기자] 망했다. 그야말로 망했다. 2004년, 신제품 '초코맛 첵스'를 홍보하려고 진행한 농심켈로그의 마케팅 얘기다. 

타는 목마름으로, 파맛 첵스여 만세!

농심켈로그는 초코맛 첵스의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 적을 만들었다. 그가 바로 '파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 파맛 차카다. 

파맛 차카와 초코맛 체키가 후보로 나선 초코 왕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파맛 초콜릿 시리얼이라니? 당시 타깃 소비자층이었던 어린이에겐 초장 없이 브로콜리를 먹으라는 말과 같은 끔찍한 소리였다. (왕국에서 왜 대통령을 뽑는지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선거 연설 영상(이자 광고 영상)만 봐도 체키를 대놓고 밀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체키는 호감형 외모지만 차카는 얼핏 보면 개구리 왕눈이에 나오는 악역, 투투 같이 생겼다. 

당시 선거 홍보 포스터. 사진 농심 켈로그

게다가 체키는 존댓말로 연설하며 어린이의 박수를 받는데 차카는 반말로 청중을 위협하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윽박지른다.

농심켈로그가 신제품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적을 만든 방식의 마케팅은 '어른이'들 가슴 속에 자리한 민주주의의 맹아를 자극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데모의 민족이다. 긴 시간, 여러 독재 정권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이뤄 왔다.

이런 어른이에게 의도적으로 한쪽만 밀어주는 부정 선거는 있을 수 없는 일. 어른이 200여 명은 데모의 민족답게 파맛 차카에 투표하기 시작했다. 이건 파맛 시리얼을 먹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부정선거 마케팅을 놀리는 일이었다.

농심켈로그는 당황했다. 소비자에게서 기대하지 못한 반응이 나왔다. 차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체키를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ARS 자동응답시스템, 현장 투표 등 여러 투표 방식을 추가했다. 한 누리꾼에 따르면 "당시 놀이공원에서 현장 투표를 진행했는데 체키에 투표해야만 사은품을 받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실시간 투표 현황 그래프. 사진 농심 켈로그

농심켈로그는 중복 투표수를 걸러내고 여러 투표 방식을 추가해 겨우겨우 체키를 당선시켜 놨다. 파맛 첵스는 마케팅 흥하게 하려고 만든 캐릭터였고, 초코맛 첵스 홍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체키가 당선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소비자도 이쯤 되면 농심켈로그의 망한 마케팅을 귀엽게 여겨주겠거니 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기자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저 들에 푸르른 대파를 보라

소비자는 파맛 첵스를 잊지 않았다. 무려 16년간 말이다. 잊을 만하면 커뮤니티와 SNS에 농심켈로그의 부정선거 만행을 올렸다. 소비자 스스로 놀이 문화를 만든 것이다.

소비자가 만든 이미지. 초코 왕국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내용이다.

이 놀이는 1일 1깡처럼 뜨겁지도 않았고 아무 노래 챌린지처럼 한 번에 왔다 가지도 않았다. 소비자는 16년간 가늘게, 망한 마케팅을 추억하며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는 파맛 첵스를 가지고 놀았다.

재미있는 건 소비자의 관심사가 파맛 첵스가 출시되는 데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작년,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 올라온 청원도 "파맛 첵스를 출시해 주십시오"가 아니다. "체키를 탄핵해 주십시오"다.

사진 청와대 청원 홈페이지

소비자에게 시리얼이 파맛이건 마늘맛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소비자에게는 마케팅 스토리 자체가 중요했다. 이들은 망해버린 마케팅에 온갖 서사를 부여하고, 인터넷 밈으로 만들었으며, 밈을 계속 재생산하면서 놀았다.

광고ㆍ홍보하는 모든 이의 바람은 한 가지다. 자사 브랜드나 제품이 소비자의 입에 많이, 긴 시간 오르내리는 것. '입소문'이란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소문'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데 '입'자를 붙였다. 여기서 '입'은 '이야기'를 의미한다. 게다가 '입소문'은 '구설수'와 달리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광고ㆍ홍보인은 자사 브랜드나 제품이 입소문 나서, 소비자가 많이 이야기해주기를 원한다.

이 목적을 생각하면 농심켈로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유례없는 마케팅 성과를 거뒀다. 망한 마케팅이었지만 16년이나 소비자가 이야기하는 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어떤 소비자도 농심켈로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비판하고 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비자는 오히려 재미있게 놀았다. 소비자는 광고 1개와 대통령 선거 캠페인 한 번뿐이었던 마케팅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며 놀이 문화를 만들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체키를 파면한다

망했지만 가늘게 흥한 마케팅은 16년만에 돌아왔다. 농심켈로그는 광고 하나만 공개했을 뿐인데 소비자는 벌써 놀고 있다. 16년 동안 그랬듯 말이다.

일단 유튜브에 파맛 첵스라고 검색하면 시식 후기 영상이 쏟아진다. 다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우유에 말아 먹은 평은 대체로 좋지 않은 편이다. "왜 체키가 16년간 독재했는지 알 수 있는 맛"이라는 평이 제일 인상적이다.

신제품이 별로면 소비자는 그 제품에 손길을 끊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놀이 문화를 만든 소비자는 파맛 첵스의 활용 방안을 개발하고 있다. 곰탕이나 순대국밥에 말아 먹는 건 이제 식상하다. 파맛 첵스로 만든 파김치, 파전, 삼겹살 쌈 등을 등장하고 있다. 제품이 맛이 없다면서도 16년 전 그때처럼 농심켈로그를 미워하지 않고 있다.

농심켈로그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소비자는 농심켈로그가 짜 놓은 마케팅 서사 안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망해버린 16년 전 마케팅이 가늘게 흥한 핵심은 여기에 있다. '재미'다. 농심켈로그에 관한 재미도, 파맛 시리얼에 관한 재미도 아니다. 마케팅 서사에 관한 재미다. 소비자는 이 서사 안에서 자발적으로 브랜드와 제품을 소비하며 홍보하고 있다. 농심켈로그가 이번 광고에 온갖 인터넷 밈을 집어넣은 것도 재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업계는 재미를 좇는 소비자를 '펀슈머'라고도 하고, 브랜드를 키워냈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팬슈머'라고도 하는데, 파맛 첵스 사태를 이야기하기에 둘 다 적절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브랜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케팅 서사에 재미가 생겨나서 소비자가 16년간 세상에 있지도 않은 제품을 가지고 놀아온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쨌거나 망한 마케팅은 이렇게 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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