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걸 영면] 온산제련소 어떻게 세웠나…재계 기억한 ‘신의 한 수’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
[AP신문 = 조수빈 기자] 고려아연은 최창걸 명예회장이 향년 84세로 영면했다고 6일 밝혔다.
고(故) 최창걸 명예회장은 최기호 공동창업자의 장남으로, 고려아연은 물론 한국의 제련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비철금속업계 거목’이다.
34세에 사업에 뛰어들어 50년을 고려아연과 함께한 최 명예회장은 "기업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죽는 것"이라며, 회사도 사람처럼 '노화 방지'가 필요하다는 경영철학을 강조했다. 멈추지 않는 성장과 진화만이 ‘100년 기업’을 만든다는 메시지다.
■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
1941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난 최창걸 명예회장은 1960년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MBA를 취득했다. 이어 1974년에는 부친 故 최기호 초대회장과 함께 자원·기술 빈국이던 한국에서 고려아연 창립을 주도, 처음으로 제련산업의 뿌리를 내렸다.
특히, 이 과정에서 최창걸 명예회장은 최기호 선대회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선대회장은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지금의 고등학교까지만 마치고 일찍 사업에 뛰어들었다. 또 사업을 하다보니 주변에는 부잣집 자제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6·25전쟁으로 38선을 넘어오며 재산을 모두 잃은 이후, 주위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최기호 선대회장은 이러한 경험들을 최 명예회장에게 들려주며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으나,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고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IFC로부터 투자·차관 도입 협정 이끈 '신의 한 수'
최창걸 명예회장은 1973년 10월 미국에서의 MBA와 3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풍광업에서 재무, 회계업무를 도맡았다. 그렇게 8개월여 흘렀을 즈음, 1973년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고, 당시 아연, 연 광산 사업을 하던 영풍광업이 제련업종을 담당하는 회사로 선정됐다. 수출품이 가발이나 섬유에 국한됐던 한국이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그렇게 비철금속제련사업을 시작한 최 명예회장은 직후 정부와 금융회사 등 관계자들을 수없이 만나 협의한 끝에 1974년 8월 1일 단독 회사를 설립했다. 기술이나 자금, 경험 없이 시작하기엔 너무 버겁고 큰 규모의 사업이었지만, ‘도전’이 주는 용기와 힘을 믿고 열정적으로 헤쳐 나갔다.
무엇보다, 최 명예회장은 세계은행 산하 국제금융공사(IFC)로부터 투자와 차관 도입 협정을 이끌어 고려아연의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자금 조달 난항 속에서 돌파구를 만들어 낸 최 명예회장의 '신의 한 수'는 지금도 재계에서 회자된다.
당시 IFC에서는 사업자금으로 7000만달러(약 700억원)가 필요하다고 봤지만, 최창걸 명예회장은 5000만달러로도 해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게다가 5000만달러를 부채 60%, 자기자본 40% 비율로 맞춰 오라는 부분 역시, 7대 3으로 협상했다. IFC에서 1300만달러를 빌려주고, 400만달러를 자본금으로 투자한 것으로, 이는 당시 IFC의 민간기업 투자 중 최대 규모였다.
■ "모든걸 내 손으로"…발품 팔아 온산제련소 세웠다
제련소 건설 과정에서의 최 명예회장 선택도 묘수였다. 국내에는 제련소 건설 경험이 있는 종합건설회사가 드문 시절이기도 했고, 해외 건설사는 통상 턴키 계약을 요구, 마진이 30%를 넘겼다. 부족한 자금도 문제였다.
이에 그는 턴키 계약이 아닌, 직접 구매에서 건설까지 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든 걸 내 손으로 해보겠다"는 그의 선택은 비용 절감은 물론 노하우와 기술 축적까지 이뤄낸, 또 한 번의 ‘신의 한 수’가 됐다.
7000만달러를 생각했던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달러로 공사를 완성하고 오히려 500만달러가 남은 것으로, 이는 최창걸 명예회장이 발품을 팔아 단종면허 토목공사업체 수십 곳을 직접 찾아 건건이 계약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온산제련소다.
재계 관계자는 "자원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세계 비철금속 No.1 고려아연을 만든 고인의 정신은 계속 남아 고려아연의 발전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