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리스크를 이해하기 어렵다”
[AP신문 = 조수빈 기자] 현대자동차그룹이 예년보다 앞당겨 이달 중 사장단 인사를 발표할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주우정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의 거취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해외 프로젝트 손실을 일괄 반영한 ‘빅배스’에 이어 기아 재경본부장(CFO) 출신 ‘재무통’ 이미지가 더해지며 체질 개선의 출발선에 섰다는 기대가 컸지만, 역설적으로 취임 이후 재무 리스크가 정리되기보다 더 부각됐다는 냉정한 평가가 뒤따른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이달 셋째 주, 이르면 17~18일께 주요 계열사 사장단 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해 대규모 인사로 주요 계열사의 세대교체를 단행한 만큼, 올해는 폭넓은 인적 개편보다는 보완적 조정 수준의 인사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주우정 대표는 리스크 관리에서 상당한 불안감을 드러내며, 임기와 관계없이 교체 가능성이 거론되는 분위기다.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조차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리스크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잇단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 말레이시아·폴란드 2200억 본드콜…‘빅배스’ 이후에도 불확실성 지속
우선, 현대엔지니어링은 올해 3분기 말레이시아 멜라카 복합화력발전소와 폴란드 폴리머리 폴리체(PDH·PP) 석유화학 플랜트에서 각각 본드콜이 발생하며, 두 건 합산 2200억원 규모의 잠재 부담에 직면해 있다.
말레이시아 멜라카 2242MW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는 현대엔지니어링·현대건설 컨소시엄이 2017년 1조300억원 규모로 수주한 사업이다. 발주처는 올해 하자보수 이행 등을 이유로 약 500억원의 본드콜을 요구했지만, 현대엔지니어링이 즉시 지급 정지 가처분을 신청하면서 현재 집행은 보류된 상태다.
폴란드 폴리머리 폴리체 플랜트는 2019년 9억9300만유로(약 1조5000억원) 규모로 체결된 EPC 사업으로, 공기 연장과 공사비 증액 과정에서 발주처와 이견이 불거지며 1700억원가량의 본드콜이 통보됐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발주처의 공사비 지급 지연 책임을 주장하며 국제 중재 절차를 준비 중이고, 해당 비용 일부는 3분기 실적에 반영되며 수익성에 영향을 미쳤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두 프로젝트 모두에 대해 “계약 및 법적 절차에 따라 대응 중이며, 일부 현장은 지급 정지 가처분을 통해 발주처와의 협의를 병행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프로젝트 완결 과정에서 손실 최소화와 재무 건전성 유지를 병행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빅배스’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해외 현장에서 대형 본드콜이 연달아 발생했다는 사실이 프로젝트 사후관리 체계 전반의 신뢰도를 다시 묻게 만든다는 점이다.
더욱이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이미 1분기 현대엔지니어링의 장기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조정하며 해외 플랜트 원가 부담과 공정 지연 가능성을 구조적 리스크 요인으로 지목한 바 있다. 이 같은 경고등에도 본드콜 이슈가 현실화됐다는 것은 주우정號의 '리스크 관리'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 ‘재무통’ 선임에도 관리 누수…1000명 순환 유급휴직까지
주우정 대표 카드의 취지는 분명했다. 기아 CFO 시절 원가 구조 개선과 실적 반등을 이끈 이력을 바탕으로, 현대엔지니어링의 낮아진 영업이익률과 미청구공사 누증, 해외 프로젝트 리스크를 정리하고 중장기 IPO 재추진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현 시점 주우정號의 결과는 플랜트본부 1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순환 유급휴직 프로그램 시행이다.
해당 조치는 해외 현장 준공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규 수주 공백 구간이 발생함에 따라, 내년 4월까지 6개월간 본사 플랜트본부 인력을 6개 그룹으로 나누어 1개월씩 유급휴직을 실시하는 방식이다. 기본급과 일부 수당은 지급하되 실수령액은 평상시의 약 70% 수준이며, 고용보험·퇴직금·근속은 유지된다. 현대엔지니어링은 이를 구조조정이 아닌 ‘운영상 효율화’ 차원의 한시적 조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반면 업계와 노동조합은 이번 조치를 사실상 구조조정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전국건설기업노동조합 현대엔지니어링지부는 “명백한 구조조정 행위”라고 반발한 바 있으며, 일각에서는 빅배스 이후에도 리스크 관리가 선제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가 인력과 조직으로 전가된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주우정 대표를 둘러싼 논란은 더 이상 단일 계열사의 경영 성과 이슈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현대엔지니어링은 약 1조2400억원대 손실을 기록하며 23년 만에 대규모 적자를 낸 현대건설 그룹 실적 악화의 한 축으로 지목됐다. 빅배스를 통해 기존 부실을 정리한 뒤에는 본업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올해도 다수 논란이 얹히며 그룹 이미지와 신용 스토리에 상흔을 남겼다.
문경원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현대엔지니어링 본드콜과 해외 원가 부담이 현대건설 실적 불확실성을 키우는 핵심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현대엔지니어링의 사업 리스크가 사실상 모회사 및 그룹 전체 건설 부문의 시장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제 공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넘어갔다. 연말 사장단 인사에서 수장 교체와 컨트롤타워 재정비를 통해 해외사업·보증·안전·사후관리 체계 전면 손질 의지를 명확히 드러낼지가 향후 시장 신뢰 회복의 방향성을 규정할 전망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현대엔지니어링의 해외 플랜트를 포함한 각종 리스크에 대해 어떤 수준으로 통제·관리하겠다는 그룹 차원의 메시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